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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가 좀 길어져 2편에서 시작한다. 살라미스 해전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전쟁을 보면서, 풍운아 데미스토클레스와 이순신 장군을 대비시켜 볼려고 했는데, 제목이 기레기스럽게 나와서 이게 뭔가 싶다. 역시나 글은 원하는대로 쓰기가 쉽지 않네. 


2. 장군 - 데미스토클래스와 이순신

페르시아 전쟁과 임진왜란에서 핵심 인물을 뽑으라면 데미스토클레스와 이순신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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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위키)

데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년 - 기원전 459년)는 도시국가 아테나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20대때부터 페르시아가 침공해 오는 현실에서 해군력 강화를 주장하였고 마침 은광산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이익으로 아테네를 그리스 최고의 해군국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정치가로서는 정적인 밀티아데스를 견제하고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추방제를 이용하여 추방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침공해 오자 해군력을 동원하여 살라미스에서 완파를 하였다. 

영화 "300 : 제국의 부활"에서는 지략가이면서 또 용맹한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이순신(2).jpg

(한글위키)

이순신 장군(1545년 - 1598년)은 서울에서 태어나 아산에서 자랐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활약한 무관으로 32세 나이에 무과 급제하여 다소 늦은 나이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안 경비와 국경 경비를 번갈아 맡아서 수행을 했고 북방 경비 수행 중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을 했었다. (28세 무과시험 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 버드나무를 꺾어 덧댄 후 말을 달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이순신이 잠시 방황해서 평안도쪽으로 유랑갔다는 가정하에 일어났을법한 일을 상상하여 영화 "천군"을 만들었다. "천군"에는 박종훈이 이순신을 맡았고 미래에서 날아온 사람으로 김승우, 황정민 등이 있다.) 


정치적인 역량에서 보자면 데미스토클레스는 민주정 국가에서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자기 능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민주정에서 최고의 위치인 집정관까지 지낸 게 결코 몰랑말랑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이에 비해 이순신은 늦게 관직에 나갔으면서도 집안 배경이 없어 한직을 돌아 다니다가 집안 배경이 있는 친구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뒤늦게 전라도 좌수사직을 받았다. 



3. 해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을 몰살시킨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여 불태웠다. 그런데 이미 데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를 비우고 "나무 방벽"인 배를 이용하여 전 시민들을 이동시켰다.

(영문 위키)

살라미스 해전은 이 형태가 15세기 레판토 해전까지 이어질 정도로 고대 해전의 전형이다. 장거리 발사무기가 없었던 고대에는 배와 배가 맞대는 근접전이나 배 아랫쪽의 충각을 이용하는 충돌전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페르시아 해군의 배는 그 숫자가 그리스 연합군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한다. 

이에 데미스토클레스는 좁디 좁은 살라미스 해협과 배수진을 이용한 전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자 했다. 수백 척 전함이 돌진해 오더라도 그 길목이 좁으면 들어올 수 있는 배는 한정되어 있을 것이며 또한 앞에서 배가 무너지면 뒷쪽에서 별 수 없이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크세르크세스가 어마어마한 해군을 끌고 왔고 또 아르테미시아 여왕이 선전을 했지만 죽자사자 싸우는 그리스 연합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2차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셈이다. (그리스 연합군이 살라미스까지 집결하는 도중에도 몇번 해전이 있었는데, 저 당시 항해 기술이 뛰어나지 않아서 배들은 모두 해안가를 따라서 이동했고 나무가 너무 젖으면 육지로 올려서 "말려서" 다시 띄웠다고 한다.)


(한글 위키)

이에 비해 명량해전은 살라미스 해전과 비슷하지만 장거리 발사 무기인 "화포"가 존재했다. 하지만 병력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할 수가 없었고 게다가 지리적인 이점 또한 일본 수군이 사전에 수로를 정탐하였기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도 이순신 장군은 살라미스 해전과 유사하게 전체 병력을 모두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상대하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적에 비해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게다가 일본 수군의 배는 대다수가 판옥선보다 크지 않았다. 


4. 두 장군의 마지막 

사실, 살라미스와 명량을 비교하기보다는 두 해전의 주역인 데미스토클레스와 이순신 장군을 비교할려는 의도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를 구한 영웅이 되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잘 활용했던 도편추방제에 의해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정치적인 계략에 의해 희생되었던 나라들이 데미스토클레스를 죽일려고 혈안이 되었기에 부득불 데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적이었던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에 망명을 하게 되고 어느 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3차 페르시아 전쟁을 준비하던 크세르크세스가 참전을 요청하자 고민 끝에 자살을 했다. 정치가이자 영웅의 최후 치고는 허탈하지 않을까.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당시에 일부러 죽은 척한 후 17세기 초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저 어디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는 전설까지 있지만,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했다. 실록을 보면 선조가 잘나가는 이순신을 많이 견제했다는 흔적이 있다는데, 그 역시도 그때 당시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니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란을 겪었고 또 그 원인을 제공한 왕"으로서 선조가 처신이 매우 부적절했고 또 후계자 문제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결국 선조의 아들 광해가 선조의 손자 인조에게 쫓겨나게 되었으며 그 후로 정묘, 병자의 난을 겪게 된 책임도 있다할 것이다. 



전쟁나면 죽는 건 백성이고 구해주는 장군은 죽기 마련이구나. 역사가 증명하는 것가. 




Posted by 이대표 이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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