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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11에서의 관우)     
                 
관우라는 이름만 들어도 삼국지를 떠올리 수 있고 또 용맹함의 상징이며 충직의 상징이 떠오른다.유비의 거병시절부터 유비를 따라 다니며 온갖 고초를 다 겪은 물이 오를때로 오른 사나이다.이런 그를 만나는 것은 우리에겐 행운일 것이다.적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정도이니 그의 인격과 매력은 무한대일것이다.

유비가 등장하는 시절부터 유비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촉한의 기반이 되었다.
촉한에서도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유비 다음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그의 업적이 그에게는 양날의 검이 되었으니...



정사에서는 그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관우는 성질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겼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자기와 비교되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으며 촉의 발전을 위한 길에도 어느 정도 방해가 된건 사실이다.혼자서 만명을 상대할 수 있는 무용을 지녔지만 결국 혼자서 천하를 없었지 않은가?촉의 오호장군 임명에 따른 황충의 임명에 불만을 지녔으며 제갈량과는 촉의 운명을 좌우 할 정도의 시기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제갈량에 대한 시기가 지나칠만도 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자기가 피땀흘려 충성한 촉한을 위한 길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느정도 맞추어 가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그의 죽음은 유비가 성도에 입성하고 시작되었다.낙봉파에서 봉추가 죽고 익주 공략이 어려워져서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제갈량은 유비를 도우러 갔다.이러면서 형주의 전권을 쥐게 된 관우는 촉한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몽과 육손에 계략에 말려 방심을 하게 되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이를 계기로 유비의 대군이 복수전을 하나 실패하고 촉한의 기운은 하향세를 향해 달려간다.이 전투에서 오호 장군의 2명이 연달아 죽었으며 촉한 주민들의 부담도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하나...왜 제갈량이라는 천재가 그를 도와주지 않았을까?서로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으니 바로 유비의 신뢰를 바탕으로 전군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던 것인데 기존의 세력 관우와 신흥 세력 제갈량의 충돌은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자기 손을 쓰지 않고 저절로 자기의 정적이 사라졌으니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닌가...촉한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실이지만 ,,

그의 죽음으로 여러 사람이 죽었지만 그중에 눈여겨 볼만한 것은 바로 조조의 죽음이다.손권에 명에 의해 잘려진 머리를 위나라의 조조에게 보내는데 함에서 꺼낸 관우의 머리가 눈을 치껴뜨고 입을 딱벌리면 조조를 바라봤고 조조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그 후 관우의 악몽에 사로 잡혀서 죽었다고 전해진다.사실이 아니든 맞든 조조와 관우의 관계도 시기가 혼란스럽고 탁한 때에 있었던 흔치 않은 사나이의 의리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조조에게 잡힌 관우는 조조의 예우에 의해 잠시 조조의 밑에서 활약을 한다.
원소와의 전쟁에서 안량,문추라는 적의 최고 무장을 연달아 떨어뜨리면서 사기를 드 높였였다.이런 관우를 잡기 위해서 조조는 온갖 방법을 총 동원하지만 결국 떠나보내고 만다.....오관육참을 하면서 조조의 진을 어지럽혔지만 조조는 관우를 쫓지 말라고 하는데...이는 사나이끼리 통한 말 못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아닐까?조조에게 빚진 것을 적벽대전에서 관우가 조조를 놓아 줌으로서 갚게 된다.하지만 촉한에게 위나라는 적이고 조조 또한 적이기에 당연히 전장에서 만났을때는 서로의 심장을 겨누어야 할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의 사후 후세 사람들은 그를 높이 추앙하는데..관성대제라는 이름으로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신령으로까지 추앙받기에 이른다.우리나라에도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고 한다.서울의 종로구 숭인동에 보물 142로 지정되어 있는 동묘라는 사당인데 여기서 관우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여기에는 나무로 만든 관우의 상이 안치 되어 있으면 그와 마지막을 함께한 아들 관평과 거병때 부터 따라 다니던 주창의 상이 같이 안치 되어 있다고 한다.중국을 넘어서 우리나라와 중국인이 사는 동남아에도 관우를 모신 사당이 많다고 하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며 촉한의 삼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그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아닐 수 없다.

이런 그의 가치를 현대의 가치고 환산해보자면 지금 우리나라 한류스타 보아나 배용준이상의 가치가 아니었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그의 무용을 논하자면 여포를 뺀 삼국지 전 장수 중에 으뜸이요 매력을 이야기 한다면 유비를 뺀 전 장수중에 으뜸이라~~~하겠다.그 당시 어지럽고 지저분한 시기에 유비를 향한 우직한 의리는 지금처럼 어제의 적이 오는의 우방,오늘이 우방이 내일의 적이 되는 시기에 산뜻한 감동을 준다.만무부당의 힘을 지녔으며 붉음 얼굴의 긴수염을 자기만의 트렌드로 가지고 있는 관우(자는 운장)은  시대가 틀리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의리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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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2에서의 관우)

삼국지 2에서의 관우의 모습니다.역사적인 그의 얼굴 묘사처럼 검붉은 얼굴과 긴수염이 보이며 이 얼굴은 나중에 나올 작품들에 영향을 많이 주었으며 어느정도 변화는 있겠지만 그래픽이 좋아졌을뿐 처음 그대로의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군주로 있는 사람이 바로 유비이다.매력100이라는 수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심통이 있어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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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삼국무쌍5에서의 관우)

현대판으로 새롭게 태어난 관우 운장의 모습이다.다소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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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삼국무쌍5 에서의 관우 )

항상 쓰고 다니던 모자는 어떻게 했냐?시대가 시대인 만큼 너도 울프컷으로 머리를 새로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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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진삼국무상3 카페에서 발췌)

그의 애마 적토마와 그의 애도 청룡언월도를 지니고 찍은 제주도 관광기념 사진되겠다.ㅎㅎㅎ
제주도 가면 조랑말 타고 기념 촬영을 많이 하듯이 우리의 관우도 놀러감 김에 사진 한장 박은게
아니었을까?


이처럼 위풍당당한 관우의 모습은 전장에서 적들에게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Posted by 이대표 이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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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랑자 2011.06.17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우는 혼자서는 좀 위험한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어느정도 달래면서 제어하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제갈량을 남겨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요?

    익주공략하면서 형주를 관우에게 맡긴 것도 물론 관우의 능력을 증명해주지만,
    방통이 죽은 후 제갈량 소환, 관우 혼자 형주 관리...

    관우 자멸....